도로시 호지킨 (Dorothy Hodgk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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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2014년 5월 12일) 구글 두들에는 이런 것이 올라왔음. 이게 뭘까? 오늘은 영국의 화학자인 도로시 호지킨 (Dorothy Hodkins, 1910-1994) 의 탄생일이다. 단백질 결정학을 주요 연구도구중의 하나로 사용하고 있는 사람으로써, 내가 사용하는 툴의 기틀을 닦은 양반에 대해서 뭔가 써야 할 의무감을 느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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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굇수

구조생물학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업적이라면? 당연히 생체물질의 구조를 규명하는 일이다. 구조를 규명한다면 기왕이면 생물학적으로 중요한 구조면 더욱 좋겠지? 평생 하나의 중요한 생체물질의 구조 정도만을 규명해도 이 바닥에서 “우와 무슨 무슨 구조를 푼 누구누구 짱짱맨~”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이 양반은 다음과 같은 구조를 혼자서 푸신 양반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양반이 이렇게 복잡한 화학물질의 구조를 X선 결정학을 이용하여 풀기 전까지는 그런 것이 가능하다라고 생각하지조차 못했다는 사실.

– 페니실린 G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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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반만 하더라도 X선 결정학은 일부 물리학자들이나 가지고 노는 실험방법이라고 간주되었고, 이것을 이용하여 복잡한 화학물질의 구조를 규명하는 것은 어불성실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도로시 호지킨이 X선 결정법에 의해서 베타락탐링을 가지는 페니실린의 구조를 발표했을때 이것이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러한 구조는 너무 불안정해서 자연계에 존재할 수 없다나.. John Cornforth라는 사람은 심지어 이렇게 말했다고. “ㅋㅋ 저게 페니실린의 구조라면 난 걍 화학을 관두고 버섯이나 키울란다 ㅋㅋㅋㅋㅋ”  If that’s the formula of penicillin, I’ll give up chemistry and grow mushrooms”

그러나 도로시 눈화의 그 구조는 맞아버렸고, 뻔뻔스럽게도 ‘버섯가이’ 는 자기의 호언장담은 입싹씻고 그냥 화학연구를 계속했다. 독버섯은 기억상실증을 유도할수도 있습니다 연구하다가 심심했는지 도로시 눈화가 갔다온 10주년 기념으로 1975년 스웨덴에 관광도 가기도 하고.

비타민 B12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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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업적때문에 이 양반은 1964년 스웨덴에 갔다오셨다. 참고로 여성으로 노벨 화학상을 받은 것은 마리 퀴리와 그 딸 이레느 퀴리 이후 세번째. 즉 이름에 ‘퀴리’ 가 안 들어간 분으로는 최초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보통 노벨상 받은분들이면 걍 이제 퍼져노셔도 연구의 일선에서 떠나기 마련이지만 이 양반은 그 이후에도 연구에 전념.그리하여,

인슐린 (196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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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이 양반은 한개를 풀어도 오오 스웨덴 어서오세염~ 할만한 일을 3인분을 하셨다는. 게다가 그 당시는 요즘처럼 결정을 만들면 슥 올려놓으면 자동으로 수백장의 데이터를 모아주고 자동적으로 회절이미지를 분석해주던 시기도 아니고, 결정 하나에 엑스레이 사진 한장 꽝 찍고, 그리고 이걸 디벨로퍼와 픽서를 가지고 현상~ 이걸 수백번 반복.  현상한 필름에서 나온 점들의 위치를 재고….등등을 반복하여 일일히 복잡한 계산을 하던 시가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ㅎㄷㄷ

2. 사회운동가

과학자로써도 초일류의 사람이었으나, 이 사람은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꽤 앞장서 발언을 하는 사람으로 유명했었다. 아마도 그 이유로는 이 사람의 멘터인 존 데스먼드 버날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이 사람은 X선 결정학의 발전과정에서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정치적인 활동으로도 유명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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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절린드 프랭클린을 Birbeck College로 스카우트해간 사람도 이사람.

여튼 도로시 호지킨은 남편인 라이오넬 호지킨과 함께 여러가지 사회정치적인 활동을 했는데, 객관적으로 볼때 좌파라고 볼 수 있는 스탠스를 가진 양반이었다. 소련쉴드 Pugwash conferences on Science and World Affairs 라는 세계평화를 위한 학자 단체의 회장도 오래하시고.

3. 멘터
그런데 도로시 호지킨은 옥스포드대학에서 있을때 학부생들을 데리고 일을 많이 했었음. 성품이 괜찮으신 듯해서 많은 학생들이 따랐다고 함. 이중 마거릿 로버츠 (Margaret Hilda Roberts) 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이 학생은 1947년 학부 4학년때 도로시 호지킨의 지도하에 그라미디신 (Gramidicin)이라는 항생제의  결정 실험을 하고 이것으로 학사 졸업논문을 썼다고 함 그리고 학부 졸업한 후 전공 살려 취직했음.그런데 이 학생은 연구직에 얼마 안 있고,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게 되는데..그게 바로 정치. 그리고 결혼한 후 남편 성을 따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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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사람이 장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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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garet Thatcher 이 됩니다.

정치적으로는 좌파라고 볼 수 있는 도로시 호지킨의 제자가 신자유주의의 화신과 같은 마거릿 대처라는 사실은 참 아이러니칼한 일이지만, 이러한 정치노선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마거릿 대처는 도로시 호지킨의 밑에서 연구를 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또한, 이학사를 가진 최초의 영국수상이라는 사실에 대해 최초의 여자수상이라는 것보다도 저 자랑스럽게 여겼다나. 이것은 이과부심…보다 정확히 말하지면 N모상 수상자 제자부심? ㅎ

공학사를 가진 최초의 한국대통령은 Carbon dioxide를 ‘이산화가스’ 라고 이야기하시지만...뭐 전자과라서 그렇다고 하고…그렇다면 전자기학이 출동하면 어떨까?

게다가 이 사람의 경우 실제로 학생으로, 그리고 회사의 연구원으로 연구를 해 본 경험에 의해서 과학 연구에 대해서는 실제로 연구를 하는 과학자들이 제일 잘 판단할 수 있다 라는 믿음을 정치가가 되서도 버리지 않았다고 함. 그전까지 영국의 과학 정책은 소위 ‘Haldane Principle’, 즉 어떤 연구에 얼마나 투자할지는 관료가 아닌 실제 연구를 하는 과학자가 결정해야 한다는 1917년의 원칙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지만 1970년, 이러한 영국의 과학정책을 수정하여 보다 시장중심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고 함. 그때 이러한 제안에 (흔히 ‘시장주의의 화신’ 이라고 생각되던 이미지와는 달리) 동의하지 않고 과학은 과학자에게 맡겨두어야 한다는 소신을 마거릿 대처는 잃지 않았다고 함. 아마 이것도 어느정도는 마거릿 대처에게 ‘과학이란 어떤 것이다’ 를 보여줬던 도로시 호지킨의 덕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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