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루엔자는 일으키지 않는 ‘그 세균’

이제는 일상적인 일이 된 생물의 지놈 시퀀싱이지만 한때는 하나의 생물의 지놈을 완전히 시퀀싱한다는 것이 상상할 수 없을 만한 거대한 일인 것처럼 생각되던 적도 있었다. 혹시 이 포스팅을 읽고 있는 독자라면 최초로 지놈 시퀀싱이 된 생물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이러스 말고)

대장균, 바실러스, 효소, 예쁜꼬마선충, 애기장대?….
네, 정답은 Haemophilus influenzae 라는 1.8Mb 의 지놈을 가진 세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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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균과 같은 전통적인 모델 생물에 비해서 이 세균이 왜 제일 먼저 시퀀싱이 되었을까? 사실 대장균의 지놈 프로젝트는 위스콘신 대학의 프레데릭 블래트너 (Frederic Blattner)랩에서 훨씬 먼저 시작되었다. 그러나 지놈 시퀀싱을 전통적인 동위원소 (…) 로 하다가 중간에 전략을 바꾸는 등의 혼란을 겪은 후에 대장균 지놈 프로젝트는 훨씬 늦은 1997년에야 완료되었고 이는 진핵생물인 효모 지놈 프로젝트보다도 느린 것이었다.
이 생물이 가장 빠르게 시퀀싱된 것은 그 당시 다른 지놈 프로젝트는 맵 기반 시퀀싱으로 일단 지놈을 큰 조작으로 나눈 다음 이것을 잘게 잘라서 시퀀싱하려고 한 반면, Haemophilus influenzae지놈 프로젝트에서는 샷건 시퀀싱 (Shotgun Sequencing) 이라는 전략으로 일단 DNA 를 잘게 자른 다음 왕창 시퀀싱한 후, 이것을 지놈 어셈블러로 어셈블리하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전략 – 지금은 표준적인 전략- 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 세균은 무슨 세균인가? 이름처럼 인플루엔자와 관련이 있나? 그런데 인플루엔자는 아는 사람은 다 알다시피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의해서 전파된다. 이 세균은 호흡기에서 많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무해하지만 상황이 안좋아지면 척수염, 폐염 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소위 ‘ 기회주의적 병원균 Opportunistic pathogens’으로 분류되는 넘들이다. 한마디로 별로 대단치 않은 넘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이름이 붙었나?

여기에는 슬픈 전설이 있다 (…)

이 세균은 1892년 독일의 미생물학자 리차드 프리드리히 요하네스 파이퍼 (Richard Pfeiffer)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그는 만병 병원균설의 대부인 로베르토 코흐의 제자로써 많은 업적을 냈다. 그의 업적 중의 대표적인 것은 장티푸스 백신을 개발한 것이다. 그 다음의 타겟으로는 당시에도 심각한 질환으로 여겨졌던 인플루엔자였다. 그는 인플루엔자를 유발하는 박테리아 를 찾으려고 했다 (바이러스에 의해서 질병이 일어난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1902년 황열병, 1908년 소아마비로써 훨씬 뒤의 일이다) 그는 인플루엔자 환자의 인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세균을 분리하였고, 처음에는 ‘파이퍼의 바실러스’ 라고 불리던 이 박테리아는 나중에 Haemophilus influenzae 라고 이름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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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세균학의 전성시대로써 수많은 질병, 가령 콜레라, 장티푸스 등이 세균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것이 알려지고 있었으며 파이퍼의 발견 역시 의심받지 않고 넘어갔다.

그러나 문제는 1918년, ‘스페인 독감’ 으로 알려진 전세계적인 인플루엔자 대유행에서 일어났다. 약 5천만에서 1억명의 사망자를 낸 것으로 추산되는 인플루엔자의 유행에서 의학자들이 그냥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이전에 발견된 Haemophilus influenzae 의 변종을 찾아서 이를 이용하여 약독화 백신을 만들면 인플루엔자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인플루엔자 환자 중에서 Haemophilus influenzae가 발견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세균이 인플루엔자의 병원균이라는 것은 의심받지 않고 있었다. 그 이유는 이 세균은 배양이 매우 까다로운 세균이라서 발견을 못 한 것은 세균 배양 기술이 미숙했기 때문이라고 퉁치면 됐기 때문이다 (….)

그러나 1921년 미국 록펠러 연구소의 연구자들이 인플루엔자 환자에서 회수되어 감염됨 실험동물의 폐 추출액에서 박테리아를 걸러낼 수 있는 필터를 통과한 물질이 인플루엔자를 일으킨다는 것을 확인한 이후 이 박테리아가 진짜로 인플루엔자를 일으키는 것인지데 대한 의구심이 커져갔다. 그러나 아직도 Haemophilus influenzae 가 인플루엔자를 일으킨다고 믿는 사람들은 줄지 않았다 (…)

인플루엔자를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발견된 것은 또 10년이 지난 이후였다. 리처드 슬로프 (Richard Slope)라는 연구자가 돼지에서 필터를 통과하는 감염물질을 찾아냈고, 같은 돼지에서 발견된 Haemophilus influenza는 인플루엔자 감염을 일으키지 않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1933년 잉간에서 같은 바이러스가 발견됨으로써 드디어 Haemophilus influenzae는 인플루엔자를 일으키는 병원균이라는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름에 붙은 ‘인플루엔자’ 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 이유와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Haemophilus influenzae라는 세균은 인플루엔자는 일으키지 못하지만 대신 최초로 지놈 서열이 밝혀진 독립 생존 생물로써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이정도면 억울한 게 풀릴까?

온갖 음해에 시달렸습니다 여러분! 제가 인플루엔자라는 거 거짓말인것 다 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