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쿡은 18세기 남북전쟁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산업화(모 문제사이트 ㅇㅂ 와는 관계없는 용어)가 진행되고, 이에 따라서 돈을 갈쿠리, 아니 불도저로 긁어담아대는 넘들이 생기게 되었다. 이런 인간들 중에서 대표적인 3인방 3대장을 본다면
기름짱 John D Rockefeller (1839-1937)
흔히 국내에서는 ‘록펠러’ 라고 읽는데 뉴욕가서 ‘록펠러 센터’가려고 ‘록펠러’라고 발음하면 유감스럽게도 잘 못알아듣는다. 아무도 못알아 듣는다. ‘롸커풰~엘러’ 라고 해야함..;;;;
철강짱 Andrew Carnegie (1835-1919)
철도짱 Cornelius Vanderbilt (1794-1877)
이들은 서로 다른 사업분야에 종사했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피도 눈물도 없이’ 경쟁업체를 말려죽어서 해당 산업계를 독점하게 되어서 소위 말하는 독점자본주의의 폐혜를 미쿡민들에게 절감하게 했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이렇게 재벌들이 아무런 규제없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면서 대자본을 축적하던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까지를 소위 ‘Gilded Age‘ 라고도 부른다. 당연히 노동자들의 생활은 극히 피폐했으며 아동노동등의 각종 문제가 속출.
손발이 부족하다 ㅠㅠ
이런 재벌의 위세는 여러가지 사회문제를 낳게 되었고, 자본가에 대한 반감 역시 고조되었다. 따라서 산업계를 독점하는 재벌의 횡포를 막기 위한 국가차원의 제제가 행해지게 되었고 1890년 반독점법 (Sherman Antitrust Act) 이 제정되게 되었고, 반독점법에 의한 재벌의 규제의 상징적인 사건은1911년 당시 미쿡 석유시장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던 Rockerfeller의 Standard Oil 이 34개의 작은 회사로 쪼개지게 되었다. 현재도 남아있는 미쿡 기름회사 ExxonMobile, Chevron과 같은 회사들은 그 전신이 Standard Oil 에서 쪼개진 회사. 그러나 롸커풸러 아저씨가 스탠다드 오일이 쪼개진 이후에 주식값 상승으로 재산을 더 불렸다는 것은 그것도 아이러니
어쩄든 이들이 죽은지 백여년이 지난 지금에 있어서 이들이 창업한 회사들은 시류에 떠밀려서 다른 회사에 병합되는등등의 우여곡절을 겪었고, 거의 산업계에서 이들의 이름을 상징하는 것들은 그다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카네기나 록펠러의 경우에는 다른 식으로 이름이 남아 있는데, 가령 앤드류 카네기는 미국 방방곡곡에 세운 도서관, 뉴욕의 공연장인 카네기 홀, 혹은 카네기 멜론대학의 이름으로 아직까지도 남아있고, 록펠러는 뉴욕의 관광명소인 록펠러 센터, 그리고 생명과학자라면 누구나 다 아는 Rockefeller University 정도로 기억되고 있다.
그런데 밴더빌트는?…..아마 밴더빌트의 이름을 들어봤다면 테네시주에 있는 밴더빌트 대학 (Vanderbilt University) 정도일 것이다. 만약 이 대학이 없었다면 밴더빌트의 이름은 지금 현재는 ‘걔 누규?’ 로 인식될 것이 뻔했을 듯. 한때 미쿡의 철도를 거의 지배하다시 했고 지금으로 치면 빌게이츠, 워렌 버핏 정도의 재산가로 인식되던 당시의 위상에 비해서 지금의 이미지는 참으로 보잘것 없는 게 사실이다.
1918년 밴더빌트 가문이 소유한 철도회사 중 하나인 New York Central Railway가 지배하던 철도망
록펠러와 카네기의 이름이 아직도 알려진 것에 비해서 밴더빌트가 듣보잡화된 이유라면 크게 2가지가 있는데,
1. 재산을 바리바리 자식들에게 물려줬고,
2. 자식들은 눈먼돈을 왕창왕창 써줬습니다. 어디에? 집 짓는데 ㅋ
밴더빌트가의 후손들은 코넬리우스 벤더빌트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미쿡 방방곡곡에 집 짓는데 몰두했다. 일단 밴더빌트가의 본진이라고 할 수 있는 뉴욕 맨해턴에 수십개의 대저택들을 지었다.
맨하탄 57번가에 있었던 손자 코넬리우스 밴더빌트 2세의 ‘살림집’
5번가에 있던 아들 William H. Vanderbilt 의 맨션.
뭐 이런식으로 맨해튼 중심가에 일가친척들 수십명이 다 으리으리한 맨션을 서로 경쟁삼아 지었다. 심시티 돋네
이건 살림집이고 ㅋ 별장은 별도죠. 안그래여? 로드아일랜드 지역에 보면 원래 살림집을 능가하는 크기로 여름별장을 지었는데
여기는 이 글 쓰는 이 블로그 주인도 가본 적이 있다. ㅋ 위치는 절벽 위에 뒷마당으로 한 수천평 되는 잔디밭이 펼쳐져 있는 명당자리이고, 방마다 무슨 프랑스에서 뜯어온 가구와 미술품이 그득, 특정한 방은 아예 프랑스에 있는 무슨무슨 성의 내부를 다 뜯어왔네 어쩌구. 근데 같이 동행한 부모님이 한마디. “근데 어째 우리가 유럽에 관광 갔을때 본 궁전 짝퉁같네”
별장도 여기만 지은 게 아니라, 아예 미쿡 전역에 다 지어놨다.
미쿡_재벌의_흔한_시골_별장.jpg (노스캐롤라이나 소재)
어느_미쿡재벌의_조그만_오두막.jpg
부동산 블로그도 아니고..아무튼 밴더빌트의 후손들은 미쿡 전역에 걸쳐서 이런 집을 수십채 지으면서 조상님 은덕을 만끽하셨다. 자세한 리스트는 여기 참조.그러나 화무십일홍 (花無十日紅)이라고 할까? 20세기 중엽에 걸쳐서 밴더빌트 가문의 가세는 점점 흔들리게 되는데, 두 가지의 결정적인 요인이 있었다.
1. 대공황.
2. 미국에서의 철도의 쇠락.
즉, 대공황으로 주식가격 폭락크리를 한번 맞으시고, 2차세계대전 이후 아이젠하워의 미국 전역의 고속도로 건설 (아마도 군생활시에 독일에서 본 아우토반에 꽂히신듯)에 의하여 자동차가 북미에서 교통수단의 중심이 되면서 철도를 중심으로 하고 있던 밴더빌트 가문은 점점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맨하턴 5번가에 들어섰던 밴더빌트 가문의 저택들은 하나둘씩 팔려나가서 헐려버렸고, 소유하고 있던 철도회사들은 다른 철도회사들과 합병 매각을 거치면서 밴더빌트 가문의 회사에서의 지배력은 점점 감소되었다. 일부 후손들은 유산으로 받은 대저택을 유지할 길이 없어서 이를 아예 지역사회에 관광자원으로 개방하고, 약간의 지원을 받아서 생활하는 안습의 길로.
그나마 이제 밴더빌트라는 이름이 남아 있게 된 요인인 밴더빌트대학의 경우가 아마 밴더빌트 가문이 행한 사회적인 기부의 전부일텐데, 밴더빌트 대학이 설립될 당시 약 100만불의 기부를 하여, 학교 설립자들이 이름을 붙여준 게 근원. 정작 밴더빌트는 대학이나 기타 자선사업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대학에 자신의 이름이 붙는지도 모르고 있었다는 게 아이러니.
결국 밴더빌트 가문의 흥망을 살펴보면 왜 현재의 미쿡 부자들이 기부에 집착하는지, 자식에게 경영권을 남겨주는데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지를 암시해 주는 거 아닐까?
암튼 4줄 요약.
1. 제 아무리 많은 재산, 현재 산업계에서의 지배적인 위치라고 하더라도 한 100년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
2. 그럴바에는 차라리 현재의 재산을 가지고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이 더 좋은 ‘투자’일 수 있다.
3. 이런 ‘투자’ 를 하려면 좀 오래남는 것을 만들어라. 자신의 전재산을 몰빵해서 세계최고의 생명과학 연구소를 만든다든지 (쿨럭) 세계 제일의 콘서트홀을 만든다든지 등등.
4. 싫으면 걍 하고 싶은 거 하세염. 아마 밴더빌트가문 후손같이 님 후손들은 님이 남기신 저택 관리로 먹고사실 수는 있을테니.